한국 역사와 문화 - 유교문화 Down
한국 역사와 문화 - 유교문화
한국 역사와 문화 - 유교문화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한국 사회는 유교문화를 기본 정신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유교는 인간관계의 틀에 대한 가르침 이다. 지금부터 이런 유교가 형성된 배경과 기초에 대해 알아보고, 한국 전통생활 문화에 유교가 끼친 영향과 성리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유교란 위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인간관계의 틀에 대한 가르침이고 유학은 이런 학문을 말한다. 유학의 맨 처음은 선진 유학(원시유학, 시원유학)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인간관계를 공자가 정리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 통일 후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없어질 뻔 했지만 진의 멸망 후 한나라 때 다시 유학의 맥을 이은 것이 한당 유학이다. 한당유학은 진나라 때 사라진 유학을 되찾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는 이 한당 유학이 들어와서 고려시대까지 불교와 함께 사회지배 이념이 되었다. 이후 유학이 우주 자연의 원리등 없었던 이론들을 받아들여 송학, 성리학으로 발전 하면서 불교, 도교와는 배척하게 되었고 고려 말에 성리학이 들어와서 생활사까지 깊이 관여하여 주자가례 등이 나타났다. 성리학의 기본 개념은 ‘성이 음양을 받아들여 정이 된다. 좋은 기가 작용하면 현우, 나쁜 기가 작용하면 선악을 나타낸다. 이때 나타난 정이 태극의 기운을 가진 사단(인, 의 ,예, 지)이 타나나고, 나쁜 기가 나오면 태극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칠정이 나타난다. 사단이 많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도심으로 이런 사람을 군자라 하고 군자는 덕을 다스리며 이성적이며 절제된 사람이다. 칠정이 높으면 인심으로 소인이라 한다. 소인은 감성적이며 본능적이며 소인이 예를 지키면 군자가 될 수 있다.’ 와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명나라 유학은 송나라 유학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이것보다 좀 더 현실적인 것이 양명학이고 청나라 때 더 변화한 것이 고증학, 실학 이지만 우리나라는 성리학이 강하여 들어오지 못하였다. 유학은 상고사상(옛 것을 되새기는 성격이 강한 것)이고, 기본자세는 원수에게는 정의로 대하고 덕에는 덕으로 대하는 현실적 성향이고 합리적이다. 맹자는 본능이 우선하기에 노력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했으며 성선설에 입각한 덕치로는 ‘형벌로써 다스리지 말고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다스려 부끄러움을 알며 정의를 찾게 하자.’ 는 것이다. 유학의 한계로는 군자들이 이해한 수 다른 사람들을 행하게 할 수는 있지만 이해시키기 어렵고, 신분제 사회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여자를 남성을 따라 교화될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런 성리학이 한국 전통생활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전통생활문화에 대표적인 것이 효와 예이다. 효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었는데 지금은 부모에게 하는 것으로 한정해서 알고 있다. 예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정하여 지키게 하는 것으로 모든 백성들이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대상이 지배층으로 한정 되었다. 이런 효와 예를 기초로 하여 삼강오륜을 중시 했다. 또한 효에서 시작하여 인생의 이치를 생각하고 깨닫는 ‘격물치지’,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성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 몸을 다스리는 ‘수신제가치국’의 정신이 중시 되었다. 하나의 사회 공동체에서 모든 이들의 생존을 위해 노인들이 도태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모습이 나타났는데 고려장도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풍습이다. 국가에서 보았을 때 이런 모습이 좋지 않았기에 ‘부모에게 잘하자’ 등 효를 강조하여 사회 보장적 성격의 정책을 폈다. 또한 양로연을 베풀어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정책도 폈다. 또한 죽은 조상에게도 효를 행했기에 사당을 지어 섬겼다. 생활 규범과 예의 측면에서는 왕실의 예인 오례, 일반 백성이 지키는 예로 사례(관, 혼, 상, 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 일상생활에서 필요에 의해 추가된 상견례와 향음주례를 추가하여 육례가 되었다. 인이라는 것은 자기를 이겨 예를 행하는 것인데 예를 실천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양, 의관이 필요했다. 수양은 인을 통해서 하며, 의관인 옷차림은 잘 갖추면 행실에 절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한국 전통사회를 신분의 구분과 남녀 구분이 나타나게 했다. 신분의 구분으로 양천을 양인(양반 + 상인)으로 나누고 신분에 따라 규제가 따르며 명분에 맞는 자리인 방위가 나타났다. 양반만 소슬 대문과 기와집을 할 수 있었고 본채와 행랑채가 엄격히 구분 되었다. 본채 안에서도 남, 녀의 구분으로 공간을 나누며 전체적으로 산 사람 영역과 죽은 사람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신분제 사회이기 때문에 상 물리기가 있었다. 이것은 상전부터 식사를 하는데 상전의 식사가 끝난 후 아랫사람들이 차례로 상전이 먹은 상에서 밥과 국을 더해 먹는 것이다. 남녀의 구분에 있어서는 지배층을 대상으로 남녀 구분이 있었다. 태종의 부부 별침령으로 100년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된 후 남자는 사랑채, 여자는 안채에서 살았다. 안채에는 내외벽이 있고 사랑채에는 누마루와 기단이 있다. 또한 여자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가리개가 있었는데 왕실에는 ‘너울’이란 것이 있었고 신분이 높을수록 두꺼웠다. 양반집 안 여자들은 장옷을 했으며 신분이 낮으면 난개 치마를 입었다.
요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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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한국,역사와,문화,유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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